
* MBTI가 과학적으로 완벽한 이론이 아니며 사람을 16가지로 단순 유형화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ENFP들이 공감하지 못할 수 있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읽어주시길!
나는 전형적인 ENFP다.
내가 생각하는 ENFP는 밝고 외향적이고, 창의적인 면이 있고,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있어 하고 싶은 일을 충동적으로 잘 시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인내심이 약해 쉽게 그만두고 지나치게 감정적일 때가 있다는 단점이 있다. 공감능력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인간 관계도 원만하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의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감정이입)하는 실수를 하거나, 교만해지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ENFP의 삶은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의 연속과도 같다라는 말을 읽은적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밝고 열정적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다는 점은 주변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 하기 때문에 나도 잘 알고 있다. 내 성격에서 나도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이런 생각이 있었다. 완성된 인간형이라는 게 있다면, ENFP는 그런 인간형과는 한참 거리가 먼 미성숙한 인간 유형을 좋게 포장한 걸거라고. 한 인간이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갖춰야 할 요소들이 많이 부족한데, 다행히 나름 귀엽고 재미있는 표면을 가지고 있어서 아직 이쁨을 받고 있는 걸거라고. 가령 내 기준 훌륭한 사람인(?) ISTJ 같은 차분하고 성숙한 완성형 인간들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뭐 이런식...
물론 MBTI 유형 사이에는 위계도, 서로 다른 기질에 좋고 나쁨 따위도 없단 것 쯤은 알고 있다. 그냥 내가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다.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는 진실일거고,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자격지심, 어느 정도는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일 것이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항상 내가 가진 ENFP스러운 단점들을 고치고 싶어해왔고, 나와 정반대의 유형들, ISTJ라든가 그런 사람들이 가진 기질을 동경해왔다. 예를 들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고 혼자 있는걸 즐긴다든가... 동시에 여러가지를 하지 않고 한가지에 몰입한다든가... 뭔가 그런 성향이 멋지고, 더 우월한 기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탓에 의도적으로 혼자 있어본다든가, 혼자 여행을 간다든가, 하여튼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을 해본적이 꽤 많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불편하고 괴로웠고, 애초에 타고나지 않은 기질이 노력한다고 얻어지는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덴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21년, 나는 30살이 되었다. 코로나19와 사회적 거리두기라니. 3일 이상 약속 없이 혼자 집에 있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ENFP에게 2020~21년은 정말 역사적인(?) 해였다. 일요일에 교회도 안 가고 퇴근 후 친구들 여럿이서 모이지도 않는 나날들이 나에겐 매우 낯선 하루하루였다. 그치만 이게 2년쯤 되다보니, 더 이상 낯설래야 낯설 수가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고, 편안해졌다. 많은 ENFP들이 느끼겠지만 사람이 없으면 못 견디므로 늘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삶이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은 괴로움도 동시에 겪는데, 그런 괴로움이 많이 없어졌다. 그리고 책을 더 많이 읽게 되었다.
물론 진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 비하면 많이 읽는 건 아닌데, 내 표현에 의하면 배고픈 사람이 허기를 채우는 것처럼 책을 먹어 치운 것 같달까.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책을 읽었다. 사람들을 만나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버리니까, 뭐라도 해야 되겠는데, 이왕이면 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목표로 책을 읽은 것이다.
문제란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문제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과 실제 내 모습 사이의 괴리, 그것 때문에 나는 ENFP인 자주 나를 자책했고 괴로워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책들이 정말 많았다. '이런 것 때문에 힘들었지, 괜찮아, 잘못된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고, 위로를 받았고, 울기도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모습들이 뭔지, 책을 읽으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으며, 어떤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극복한게 있다면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나에겐 소중한 성장의 경험이니까. 기록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잊어버리고 제자리로 복귀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제목을 ENFP 탈출기라고 지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ENFP이긴 하다. ENFP 탈출을 한건 아니니까 모순인가? 그럼 뭐 어때. 그래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나를 탓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게 됐으니까.
앞으로 내가 풀어갈 이야기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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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성
다른 사람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
한가지를 꾸준히 못함
무제한적인 관계의 확장
경제관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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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가 생각나는데, 더 있을 수도 있고. 다 이야기하지 못할 수도 있고.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ENFP 탈출기를 시작합니다.
2021.09.26